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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모이라이 Moirai》는 산수싸리 주관 프로그램 ‘전시, 다시’에 참여한 기획자 김얼터, 김한라, 김희주가 만든 결과물입니다. 시각예술 기획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그 활동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프로그램이었던 ‘전시, 다시’는 여러 차례의 워크숍을 거쳐 좋은 전시란 어떤 것일지 고민하고, 각자의 전시를 회고하고, 또 새로운 전시를 기획할 수 있도록 공통의 지반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아래에 워크숍 1~4회차에 해당되는 대화록을 공개합니다. 이 대화록은 각자에게 영감을 주는 전시를 소개하고 거기서부터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2023년 5월 24일
좋았던 전시 회고 : 좋은 전시 체크리스트 만들기 01

김민지

<길 위에서>
이 지역을 같이 걸어보고 이 지역 518 사적지를 조망해보면서 본인의 시각이나 사유에 따라 작업해주기를 요청했다. 성역화된 역사의 전유물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조명해 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좋은 전시고 부끄러움이 덜 했던 전시다. 작가들의 작업이 개인적인 취향에 잘 맞았기 때문에 그렇고, 관객이 되어서도 즐겁게 봤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야기하게 되었다. 518은 광주에서 굉장히 많은 장르에서 접하게 되는데 과거 재현적인 작업이 아니라 현재 관점에서 감각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기획 의도와 작업이 매끄럽게 연결됨. 하나의 동일한 맥락을 갖고 있다는 점. 맥락은 같이 하되 개별적 시각이 달랐다는 점. 개별적인 취향이라던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눠보고자 한다.

<거의 정보가 없는 전시>
부산현대미술관
파격적인 시도를 했던 전시. 기획 의도가 뻔해서 재미가 없다는 평가도 있지만 일반 대중의 시각에서는 천재적이다라는 평가들이 존재한다. 전시의 기본 틀은 전시장을 채우고 있는 작품들을 오롯이 감상하라는 것이 포인트. 전시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목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좋았다. 기획자 입장에서 모험적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현했다는 점에서 용기 있다.

전시를 봤을 때 작품을 오롯이 감상한다기보다는 기획자의 의도를 해석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전시와 관계가 없을 수 있는 부가적 네러티브에 집착하려 했던 것을 돌아보게 되었다. 기획자의 의도가 명확하게, 다양하게 드러나는 전시에 흥미를 갖는 반면에 기획자와 작가가 하나의 지점에 만나게 되는 지점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지역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 않을까? 스스로 전시기획을 하는 입장에서 전시장을 꾸릴 때 관객이 전시를 감상했을 때 내가 의도한 것과 작가가 의도한 것이 맥락적으로 잘 전달될 것인가에 대한 집착, 콘텐츠가 아닌 나의 맥락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라는 생각. 그렇지 않고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불필요한 집착을 버릴 수 있는,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읽힐 수 있는 전시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서문, 캡션을 꼼꼼히 보지 않아도 좋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김민지의 좋은 전시 체크리스트>
① 좋은 작품을 하나라도 발견하게 되는 전시.
② 난이도 높은 지식이나 기술이 개입하지 않고 정서, 감각적인 공명을 이끄는 전시.
③ 전시 공간에서 하나의 맥락 –기획자의 의도-가 읽혀지는가?
앞서 소개한 전시들이 어떻게 좋은 전시가 될 수 있을지 논의해보고 싶다.

김희주

웃긴 일화를 하나 이야기하고 싶다. <에브리띵 에브리웨얼 올 엣 원스> 영화를 처음 영화관에서 봤을 때 정신을 차리고 본건 5분 정도. 그 정신없는 영화를 보면서 그럼에도 너무 좋았다고 이야기했다. 그 경험이 어쩌면 한창 전시를 많이 볼 때 잘못된 습관 같기도 했다. 당시에는 서울에 많이 갈 수 없었고, 떄문에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고자 했다. 디테일을 놓치면서도 맥락만 파악하려 했다. 화면구성, 대사, 편집을 보면서 훌륭한 영화라고 판단했다. 이제는 안 그런다. 나는 그 영화가 참 좋았는데 컨디션이 안 좋아서 잠을 잤다. 나중에 컨디션 좋을때 영화를 다시 차분하게 봤는데 정말 좋았다. 전시를 빠르게 맥락만 읽어내는 전시 감상 태도보다 더 나은 태도가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시각예술에서 가장 재밌었던 부분들은 개념미술이 컸던 것 같다. 미술 이론을 공부하려 했던 이유도 요셉 보이스, 데미안 허스트, 백남준 때문이었듯, 작품별로 컨텍스트를 알면서 내가 하나의 막을 가지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하지만 이 전시처럼 정보를 알지 못하고, 미술관에서 그것을 배제하면서 일반 관람객들한테 시각적으로 다가간다는 것은 분명 실험적이다. 그렇기에 작품의 정보를 적절하게 전달하는 전시라기보다는 실험적, 흥미로운 전시 같다. 사후인 지금 전시를 찾아봤을 때도 정보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메이저 박물관에 가면 손가락으로 밑줄을 그어가면서 캡션을 읽어서 훼손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정보를 가지고 가서 이해해보려하는 클루를 찾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캡션을 긁어보는 행위들도 알고 싶은 정보라던지 이런 클루를 찾지 못해서 그런 행위들이 나오지 않았을까. 또 비엔날레 같은 경우에는 정보가 중요한 전시. 그렇기에 개인적으로는 시간을 내서 세 번 정도 보기도 한다.

모쪼록 그런 이유들 때문에 이 전시가 매우 흥미롭지만 매우 좋은 전시다, 매우 좋다고 꼽기에는 개인적으로 모호하다. 개인적인 취향 때문일 수도 있다. 미니멀리즘 작품에도 다 의도가 있는데, 큐레이터는 전달하고, 사서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 전시 같은 경우에는 그걸 다 지워낸다는 것이 오히려 작가주의 큐레이터의 접근법 같기도 하다. 국공립에서 이걸 시도했다는 것은 확실히 흥미롭고 대단하다.

김민지

좋았던 점을 이야기 하려면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텐데 좋은 전시라고 하면 형식적으로 볼 수 밖에 없더라. 광주에서 하는 전시는 대부분 가려고 하는데 공간, 기획자, 작가가 다양하지 않다 보니 다양한 사례를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 아쉽다. 전시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논의를 해보고 싶었다. 다른 분들은 전시를 준비할 때 어떤 것에 중점을 두는 편인지 궁금하다.

김얼터

<정보가 없는 전시>는 개인적으로 뭔가 아쉬운 전시였다. 공공기관 전시에서 할 수 있는 예술적 실험이란 어떤 형태여야 할까, 하는 고민이 엿보였다. 부산현대미술관이 근래 들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고 그 일환으로 생각해 볼 만한 전시였다고 평하고 싶다.

민지님이 하신 말씀처럼 기획자가 전시를 설명하기 위한 언어에 기대지 않고 작품 자체로 관객을 설득하는 전시가 좋은 전시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전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전시 리플렛을 가능한 작고 가볍게, 현장에서 읽을 수 있을 정도로만 만든다. 100g 이상의 B5로 만드는데, 손에 잡히는 컴팩트함을 위해서다. 꼼꼼하게 읽지 않아도 되는 글을 쓰려고 하는 편이고, 글이 많은 전시는 지양하고 있다.

<길 위에서> 같은 전시는 주제로서 내가 관심 있는 방향과 미적 취향에 맞지 않을지라도 이 작가가 왜 여기 들어오게 되었는지 전시 안에서 납득할 수 있었기에 소정의 성공을 이룬 전시라고 생각한다. 우회하지 않는 길, 성실하게 정도의 길을 걸었다는 게 느껴지면 괜찮은 평가를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희주

정보가 있는 전시라고해서 시각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전시가 있나? 정보가 많아도 아름다울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길 위에서> 전시가 좋았던 점은 작업들이 커미션 작업인가? 커미션 작업에 대한 부담감들이 상당했을 건데 게다가 정확한 사건을 다루는 작업이다보니 모두가 진지하게 임한 것 같다. 작품 하나하나가 각자의 매체를 가지고 풀어냈다는 게 감동적이다. 작가들 모두 다 작업을 잘 풀어낸 것 같아서 기획자 입장에서 만족스럽다고 하지 않았을까. 커미션은 계속 해야하는 숙제인듯하기도 하다. 어떤 작업에 따라서 커미션 작업이 괜찮기도하고 아니기도 하다.

김민지

내가 얘기 하고자 하는 것에서 포텐셜이 있는 작가다 생각했는데 결과물이 그렇지 않았을 때에 그 당위성을 내가 설명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충분한 예산, 지역적 한계를 느낄 때 친한 작가에게 기대는 지점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길 위에서>는 예산이 충분했고 그래서 서울 작가들과 작업할 수 있었던 것. 그래서 이 작가랑 했구나~ 이런 것에서 탈피하고 싶다.

김얼터

나 또한 친구 작가들이랑 작업을 많이 해 왔는데, 그렇다면 더 진지하게 작업에 임하게 된다. 전시에 대해 관객들이 속속들이 알기는 어렵지만, 사적으로 아는 사이라면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희주

친구 혹은 지인과 작업할 때도 있다. 하지만 같은 이름들이 매번 함께 나온다면 아쉽다. 새롭게 엮이는 씬들을 보고 싶은 마음.

김얼터

돈이 너무 없는데 전시를 해야 할 때 모르는 사람을 불러다가 하기는 어렵긴 하다.

김민지

지역, 경험, 적은 예산이어도 작가가 인지도가 있을 때는 작가 피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전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율성 해방이라는 점에서 좋다고 생각한다. 전시 기획을 새롭게 할 때 관람자에게 많은 글을 읽게 한다거나 인지적 노력이 필요하지 않아도 감상적인 부분에서 제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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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31일
좋았던 전시 회고 : 좋은 전시 체크리스트 만들기 02

김얼터

<DO it 2017>, 일민미술관, 서울
메뉴얼 북이 따로 있었고, 그 규칙에 따라 관객이 행동해야 했다. 굳이 메뉴얼대로 하지 않아도 되는데 관객들은 왜 작품과 전시에 참여할까? 여러 생각을 거치면서 나는 관객을 어떤 상황 안에 몰아넣는 것에 관심이 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관객을 상황 안으로 끌어넣는 것이 무엇인지 부연해야겠다. 관객(사람 대부분)은 자기 현실이 어떤 모습이 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은 일상생활 안에서 발견하기가 어렵고 전시 안에서는 특출나게 발생하는데, 바로 그 발생을 위해 어떤 상황을 인위적으로 조성하는 것을 전시의 역할로 보고 있다. 서로 배경지식과 환경, 생각, 방식이 다 다른데 동일한 환경에 놓이게 되었을 때, 각자에게 현실이 다르게 발현되는 때와 곳으로서 전시가 흥미로운 매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순수박물관. 오르한 파묵의 소설에 나오는 박물관을 현실에 구현한 것이다. 픽션과 논픽션이 겹쳐지면서 발생하는 무언가가 나에게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상황 안에 관객이 밀어 넣어질 때 누군가는 “이런 건 다 가짜야”라고 생각하는 반면, 유머러스하게 그 안으로 넘어오는 관객들이 있다. 넘어오는 관객들이 많이 발생할 때 좋은 전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세트장에도 관심이 있다. 거짓말로 지어진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 않나. 디즈니 랜드에서 일하는 백설공주 알바생을 백설공주로 인정하듯. 사람들이 현실을 선택하고 구성할 수 있는 상상력. 현실적으로 만들어 놨지만 가짜인 것에 관심이 있다. 마르셀 뒤샹도 비슷한 의미에서 좋아한다. 첫 번째 초현실주의 전시에서는 실로 작품들을 칭칭 감아서 작품에 접근할 수 없게 해 두었는데 물리적인 조건들을 통해서 무엇을 볼 것이고 그 작품의 최종 양태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같은 것들이 전시 연출로 드러날 때 재미있는 전시가 된다고 생각한다. 물리적인 장애물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이런 것을 레퍼런스로 삼고 싶다.

김민지

뒤샹이 작가들에게, 당신의 작품을 가리고 관객들과 거리를 둘거야 이렇게 말했을까? 이런게 궁금하다. 몰입형 실감 콘텐츠 전시가 늘어가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얼터님의 생각이 궁금하다. 생각보다 동시대 현재의 전시보다 과거의 전시나 작품을 소개해 주신 거 같아서 그렇게 된 이유도 궁금하다.

김얼터

몰입형 실감 콘텐츠 전시들 솔직히 형편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사람들이 다 행복해하는데 혼자만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럴 때면 즐기지 못하는 내 쪽이 오히려 촌스러운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고. 몰입형 전시들을 조금 더 많이 다녀보려고 한다. 가볼 만한 곳, 볼 만한 곳, 사람들은 언제나 콘텐츠를 원한다. 그런 콘텐츠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나를 위시한 동시대 미술의 문제점일지도 모른다. 나중에 그런 전시를 해보고 싶기도 하다.

과거 전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시기에서 가능한 기술적 환경 안에서 이런 걸 상상해 낼 수 있다는 게 놀라워서다. 1900년대의 사람인 뒤샹은 타인으로 하여금 100년 동안 고민할 수 있는 수수께끼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지금의 나보다 세련됐다는 생각도 한다(단순 팬심도 있다). 세기를 넘어서 유효한 문제를, 수수께끼를 만들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 만약 내가 미술을 계속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게 이유인 것 같다.

김민지

몰입형 실감 콘텐츠에서 오는 괴리감에 대한 것에 공감한다. 스스로 전시를 하는 사람 입장에서 일반적으로 미술에 대해 이해도가 낮은 대중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있다는 게 반갑다. 전형적이지 않은 시도들을 충분히 보여주고 계신 것 같아서 이야기 재밌게 들었다.

김한라

현수막에 ‘~전시회’ 라고 적힌 것을 보았다. 그런데 친한 작가에게서 ‘전시회’라는 말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들었다. 여전히 ’회‘가 붙는 이유가 뭐지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전시를 기획하는 데 있어서 전시를 찾아온 주체의 동선이나 시선의 위치나 관람 자세나 관람하면서 하는 행위들이 단일적이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전시를 보러 갔을 때 그런 요소나 장치들이 있을 때 좋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런 기획을 했을 때, 혹은 그런 걸 원하고 기획을 하려고 하거나 했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기획자의 연출과 작가의 창작의 역할 경계에서 ‘이쪽으로 더 기울었네, 저쪽으로 더 기울었네’, ‘작업을 하고 싶은 건지, 기획을 하고 싶은 건지’ 등등. 여기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누어보고 싶다.

김얼터

기획을 하는 거야 작업을 하는 거야 하는 말.... 나는 이상한 거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활동명이 있는 것도 명칭 자체가 그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한 건데, 너한테 그 이름이 왜 필요한지 설명을 하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을까, 내가 하겠다는데 왜 변명을 해야 하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가 설득력 있게 결과물을 내보이면 사람들이 따라 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우직하게 밀고 나가면 나의 스타일이 생길 거고. 전에 했던 전시에서 왜 서문을 존댓말로 쓰는지 공격적으로 말한 사람이 있었는데, 서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각자 자유롭게 생각하시면 된다고 답했다.

김희주

서문의 방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전 세대들이 해 왔던 서문의 틀을 배웠지 않나. 학부 때 재밌는 서문을 썼던 기억이 나는데 다른 사람에 의해서 완전히 해체된 경험이 있어서 그 이후로 서문은 이렇게 써야 해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래서 그 이후로 ’전시는 이래야 해 작품은 이래야 해‘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 같다. 뭐가 맞고 틀리고라기 보다는 가면 갈수록 그런 상황이 많아지고 그런 상황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 슬프다. 몰입형 전시라는 것이 최첨단 미디어를 잔뜩 섞어 만든 전시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스펙타클로 몰입되는 전시도 있고, 어떤 전체 맥락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기에 몰입되는 전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팀 랩> 전시는 확실한 몰입형 전시였다. 사람들이 테마파크와 미술관의 경계에 있는 듯했다.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물을 느끼고 빛을 보고 하는 것을 보았다. 기존의 미술에서 대항해 발생한 맥락이라기 보다는 오늘의 미술의 그 방식이 많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든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기술 안에서도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획을 하고 작업을 하기도 하는 사람으로서 지나고 보니 무대미술 같은 걸 하고 싶어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된 이유가 몰입형과 연관이 있는데 모두가 다 상상을 많이 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다른 말로 집중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 같기도 하다. 많은 자극이 오고가고 많은 것들을 상상하게 되고. 경계를 나눠야 하는 이유에 대한 것은 편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인 듯 하고. 어떤 공연에 간 적이 있는데 내가 미술 전시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방향들이 거기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보고 재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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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4일
좋았던 전시 회고 : 좋은 전시 체크리스트 만들기 03

김한라

ISEA 2019
대주제가 영원한 빛. 광주가 빛고을이라는 뜻이라서 빛이라는 것을 문화 과학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해석해서 4가지 소주제를 포괄하는 대주제가 있었다.

첫 번째 주제는 인간의 영원성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가진 작품들. 빛이 가진 영원성이라는 주제로 종교 과학 인문적으로 풀어냈다.

두 번째 주제는 소리와 빛. 둘 다 파동, 파장의 특성을 가짐. 그것에 주목해서 영감을 얻은 작품, 노이즈를 추출해서 시너지를 내거나 하는 것.

세 번째 주제는 빛을 계몽으로 해석함. 인간과 인공. 인공 감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AI 인간을 규정하는 본질에 대한 물음들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

네 번째 주제는 자유주제.

이 심포지엄의 작품을 볼 일이 굉장히 많았다. 좋았다. 그런데 아주 일부분 이게 예술 전시인지 기술 박람회인지 잘 모르겠다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 둘 사이에서의 한쪽으로 무게를 두는 것, 무게를 두게 만드는 요소, 과연 기술예술에서도 어떤 구분점이 유효한지, 필요한지 등등을 생각하게 되었다.

<데이터 정원>
과학과 예술의 협업에서 나온 전시. 카이스트와 협업하여 6회차 전시했다. 과학과 예술의 협업을 하는 목적. 전시 서문이 좋았던 이유는 데이터를 단순 정보로만 볼 것이 아니라 세계를 접하는 하나의 감각이나 방식으로 다가가겠다는 취지. 총 7인의 창작자와 6인의 과학자가 참여한 전시. 서로가 데이터를 상호 교환해서 새로운 데이터를 공감각적으로 시각화했다.

전유진 작가와 남민호 과학자의 작품. Mother A.
이것은 과학자가 별세포에 대해서 연구를 하는데 뇌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신경세포를 감싸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배경이나 환경으로 인식이 되어왔다. 남민호라는 사람의 연구가 별세포가 배경이나 환경이 아니라 운동적, 방어적 능동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혀내면서 과학적 인식 전환을 이룰 수 있었던 연구라고 한다.

전유진 작가가 이를 대자연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해서 진행된 작업.
별세포가 역사적으로 주변적으로 인식되었던 여성, 자연,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고 별세포를 대자연의 개념으로 해석하면서 전자적인 장치로 작품을 한건데. 삼베 천 위에 관객들이 전도성 실로 회로를 만들고, 별세포의 모양으로 제작한 led를 놓아 작품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모르는”프로젝트라는 작업.
AI를 연구하는 과학자와 이예승 작가가 함께 했다. 인간과 AI. 지적 생명체이지만 자연 생명체인 인간과 인공 생명체인 AI가 호기심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같이 탐구하고 적립해 가는 여정을 작품화한 것.

예술가와 과학자가 주고받은 응답 같은 내용이 실린 작품이 인상적이다. ’모른다‘라는 키워드로 서로에게 문답을 주고받고 반복하는데 기술이라는 것이-AI가- 어떤 시각 예술의 수단이나 도구가 되는 것 이상으로 기술과 예술이 서로에게 상호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혼란이나 의구심이 덜하지 않았을까 싶다. 테크놀로지나 데이터 기반으로 하는 전시들이 많이 기획되고 있는 추세이다.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다.

물론 두 전시 간을 두고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그 비교 대상 자체의 설정이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ISEA는 컨퍼런스적인 성격이 강해서 일반 시각예술 전시기획보다는 제한적이지 않은 접근법이었던 것 같고, 많은 작가들의 공모에 제안이 될 만한 주제나 구조 설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작가의 작품을 끌어낼 설정이 느슨했을 것 같다. 학제 간을 아우르는 이야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두 번째 전시와의 비교가 조금 무리일 수 있겠지만 두 전시를 보면서 느꼈던 생각들이 다소 달라서 가져왔다.

영국의 와이어드지의 편집장이 쓴 칼럼 ’이론의 종말‘이라는 텍스트도 가져와 보았다. 이 칼럼을 요약하자면,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과학적인 방법론이 가설을 세워두고 가설을 검증하는 방식인데 이런 방법론이 데이터의 양이 적은 경우에는 일부 데이터를 보고 가설을 세우고 나머지 데이터를 가지고 검증한다. 요즘처럼 천문학적인 데이터가 존재하는 경우에는 전자의 방법론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2년간 데이터의 양이 전체 인류가 생산한 데이터의 90퍼센트를 차지한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데이터 생산이 가속화되고 있는데 30년 전에 통계학자가 했던 ’모든 모델은 틀렸는데 그 중의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유용하다‘라는 말이 당시보다 오늘 날의 대용량 데이터 환경을 적확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구글의 연구책임자가 했던 말도 살펴볼 수 있겠다. “모든 데이터들이 틀렸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없어도 성공할 수 있다.” 처리 불가능하고 헤아릴 수 없는 대용량 데이터 중에서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이라는 말. 결국에 너무나 많은 데이터가 모이다 보니 노이즈라는 게 없어지고 큰 흐름에서 데이터가 옳은 것, 맞는 것이 되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

데이터의 구조에 대해서 인간의 지능으로 파악하는 것이 한계점에 도달한 상황. 어떤 것이 더 중요한 정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는 상황. 많은 데이터가 어떤 현상을 가리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그러려니 믿는 것뿐이다. 라는 내용이다. “앞으로 더더욱 다방면에서 데이터의 규모가 대용량화 될 것이기 때문에 데이터를 분석하고 의미를 찾고 데이터가 보여주는 것에서 무언가를 찾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 유일하고 유용한 방법이다.”라고 말하는 칼럼이다.

앞선 두 전시를 보면서 이 글이 생각이 났고, 이 글을 읽고 이론이 끝났다고 단언하는, 혼란에 대한 답을 이 글에서 찾았는데 한병철이 이론의 종말은 빈약한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1984>라는 소설도 생각이 났다. 그 안에서의 세계관에서 불법행위로 금기시하는 행위가 사색, 일기, 사랑하기. 생각하고 기록하고 사랑하는 것. 세 가지 일 모두가 서로를 상호 대면하는 하나의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서로를 유사어까지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두 전시와 두 글에 대해 생각하면서 어쩌면 그 생각이 맞았겠다는 생각에 도달하였다. 책 속의 세계관 속에서처럼 불법으로 금지되진 않지만, 오늘날 빠른 속도화로 인해 사람의 행위에서 감해지고 있는 세 가지이기도 하다. 이 세 가지 행위의 공통점을 생각하면서 팩트와 리얼리티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실제라는 팩트로부터 실재라는 리얼리티로 옮겨가는 3가지 행위인데 이런 사유를 통한 기획이 되지 않았을 때 데이터라는 팩트가 시각예술이라는 리얼리티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도 들었다. 사유가 누락 된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작품이나 전시를 볼 때 의구심을 지우기 어려운 경우에 직면한다. 모두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김민지

그럼 한라의 좋은 전시 체크리스트는 사유인가?

김희주

아트 앤 테크놀로지 작업을 할 때 말하는 것 아닌가?

김한라

예술보다 기술에 치중되어 있다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는데 의구심에 대한 지금까지 찾은 나름의 실마리는 위와 같았고, 그 이야기에 대해 나눠보고 싶었다.

김희주

<사유정원> 자체가 아트 앤 테크가 엄청 많이 들어간 전시인데, 그렇다고해서 사유라는 것이 없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ISEA에 참가했던 해외 작가 중에 올리브유로 했던 작업이 있는데 그 사람한테는 엄청난 사유이고 과학이라기보다는 예술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그 작가를 생각해도 예술이 모두 다 자기 세계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소재, 주제 면에서 자기가 선택한 것이 있으면 기술적인 부분으로 들어갔을 때 그게 사유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기술이 계속 발전하고 매체가 발달하면서 이제는 0과 1에서 감성을 찾아가는 시대 아닐까 그게 보편이 되어가는 시대가 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김민지

아는 만큼 보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기술이라는 형식을 따르고 있는 전시 앞에서 알맹이, 사유, 내가 감각하는 예술적 지점을 어디서 느껴야 할까에 치중되어서 보는 경험이 더러 있긴 하다. 관심사의 차이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김희주

그런 듯하다. 세상은 모든 게 다 노이즈고, 세상은 모든 파장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것을 감각하는 게 거대한 자연이었다면 이제는 그 자연을 읽어내는 단위 정확한 과학. 자연적이라는 말이 곧 과학적이라는 말과 같아지는 것 같다. 갈수록 사람들이 규정하는 범주가 과학적으로 명확해지면서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는 건 아닌가.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부분을 이해하려 하면서 하는 것이 전시를 보는 방식이기도 하고, 모르는 문화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고 하는 좋은 기회이고 장이라고 생각한다.

미디어아트를 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매체를 다루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과 기술로 작업을 하는 친구들을 봤을 때 예술기술 전시도 같은 맥락아닐까. 전시장에 게임기가 많은 것만 봐도 바뀌고 있지 않나. 영상작업에서도 셀피모드로 해서 필터 해서 촬영하는 거, 영상에서 카톡 이런 거 뜨는 것도 이제는 자연스러워지는 것처럼 사유가 없어진 것 같지는 않다. 기술이 너무 발달해서 사유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인 거 같다. 사유란 고요함을 필요로 한다는 문장이 계속 마음에 걸리기도 하는데. 노이즈 안에서 고요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많은 변화가 있는 것 같다.

김민지

관람자와 작품의 징검다리. 매개가 있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아닐까?

김한라

작품 내에서 뭔가 상대적으로 기술적인 성취가 너무 고도의 성취이거나 기술로 문댔다는 생각이 들 때 그런 느낌이 든다.

김희주

예를 들면, 레픽 아나돌 데이터를 가지고 사유하고 연구해서 스타일을 정립한 건데, 그걸 따라 하는 사람들로 인해 그러한 스펙타클이 개념적으로 가볍게만 여겨지는 것 같기도 하다. 또 한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작업의 층위를 나누고 있는 건 아닐까. 소소한 미술과 거대한 미술이 둘 다 있을 수 있지만 둘 다 생각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스케일의 차이일 뿐이지. 복제, 따라했다고 해서 생각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김민지

맹목적으로 스펙타클에만 목적을 뒀구나 그런 작업들을 발견하는 경우들이 많다 보니 사유가 소멸된 회의가 들 때가 있는 것 같은데. 지난 시간의 몰입형 미술이 떠오른다.

김얼터

전시가 사유를 담아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전시와 작업은 서커스라고 생각한다. 서커스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트리플 악셀을 하는 김연아를 생각할 때. 잘하는 걸 한다는 느낌이라서. 행정, 법이든 무엇이든 왜 좋아해 라고 묻지 않는 것처럼 예술로 뭘 생산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괴롭다. 생각하지 않는 전시도 그것으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결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진지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 숨이 막힌다. 직업적 차이가 있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모두가 재미있어서 무언가를 한다는 전제로 성과를 내면 좋지만, 성과를 내는 전시가 좋은 전시는 아니니까.

김민지

초반에 이야기했던 정도의 길. 세금을 사용한 전시의 책임이라는 말에 위배되는거 아닐까.

김얼터

전시 사이클과 작업 주기는 구분해야 한다. 지금은 모든 작업이 기금에 의존하여 만들어지는 것 같다는 인상도 있다. 과연 좋은 일인지 의심해 보아야 할 때.

김민지

전시와 작업의 차이?

김얼터

전시는 목적이 있고 작업은 목적이 없다. 작업은 근원 없는 발화다. 가끔 내가 왜 여기에 목매고 있는 거지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그러나 전시는 전달이다. 여기에도 발화 같은 전시는 있겠으나, 원칙적으로는 메시지 전달이 전시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김희주

예술기술하면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김얼터

그래도 노력을 많이 해서 완성도를 가지면 예술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나.

김희주

연구 같은 거 아닐까.

김한라

내가 말하는 ‘사유’란 ‘자기화’와 동의어이다.

김얼터

완전히 작가에게 체화된 기술이라면 그것도 어떤 종류의 예술인 것.

김희주

그래도 역시 질문이 없는 건 재미가 없긴 하다.

김얼터

또 너무 사적이면 그런 건 일기장에나 쓰지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모든 걸 반박하고 싶은 사람인 걸까……? (웃음) 배우나 연주자, 스포츠 선수 등 실연하는 사람들을 예술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듯이, 기술만 있다고 해서 예술가가 아니라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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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6일
좋았던 전시 회고 : 좋은 전시 체크리스트 만들기 04

김희주

<Time is out of Joint>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되게 길게 했던 전시고 로마에 있는 국립미술관에서 했던 전시. 여기 사이트는 아주 큰 공원 안에 아주 큰 미술관이 있는데 사진을 같이 보며 소개하겠다.

이 전시는 일단 아주 거대한 갤러리 그러니까 미술관 국립 갤러리에 있었고 많은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작품의 전시 제목처럼 시간을 벗어난 타임 이즈 아웃 오브 조인트라고 해서 ‘모든 게 다 시간을 벗어나 있다.’ 그런 뜻을 가진, 사실 이게 햄릿에서 나왔던 대사인데 ‘시간이 맞지 않다.’ 이렇게 번역이 되기도 하는 문장.

그래서 엄청 다양한 시간대를 가지고 와서 예를 들면은 아주 옛날에 있었던 르네상스 때 작품도 있고 혹은 그보다 더 예전이 고딕 양식을 가지고 온 작업도 있고. 지금 보는 것처럼 완전히 동시대라고 말하는 근래의 작업들까지 해서 쭉 가지고 온 전시인데 이 전시장에 갔을 때 일단 공간이 엄청나게 커서 그 작품들이 다 조각과 회화가 마구 다 뒤섞여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미지를 잠깐 보면 이런 식으로 작업이 회화가 있고 조각이 섞여 있고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다들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배치가 굉장히 멋지게 되어 있었다. 관람객의 시선에서 봤을 때 두 작품 간의 연관성을 계속해서 생각하게끔 만드는 배치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혼자 막 사이를 걸어 다니면서 굉장히 재미있었던 경험이었다.

조각상과 회화 간의 그런 교차점들이 되게 재밌었는데 지금 보는 이 작업 뒤로 이렇게 작게 보이는 회화 작업들 혹은 완전히 크게 보이는 회화 작업들이 서로 배경을 이루어주고 이런 알 수 없는 둘 간의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 서로 배치했을 때 약간 미적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형성하는 그런 작업들이 많았다. 이 작업 같은 경우에도 회화 뒤에 있는 꽃 그림과 여기 있는 조각상 그림이 뭔가 하나의 폭을 이루는 것 같은 그런 그림들이 많았고. 그리고 아주 큰 약간 라오콘 군상 뒤로 엄청 크게 들어가 있는 추상회화 작업들 이렇게 배치 되어 있는 것들이 엄청 격정적인 조각상의 얼굴 표현에서 뒤에 있는 초상의 빠른 그런 충동성 그런 것들이 느껴지는 작업들이 같이 배치되어서 굉장히 재미있었던 것 같다.

쓱 보기만 해도 유명한 작가들이 아주 많이 나왔던 것 같은데 뭔가 파리에 있는 루브르 때보다 굉장히 재미있었던 이유는 시대별로 나눠 놓지 않고 시대를 모두 섞어서 그것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 같은 배치가 되었던 게 굉장히 재미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작업들도 사실 딱 방에 들어갔을 때 조각상이 등을 보이고 있는 형태가 많았는데 이 조각상이 회화 작업을 보는 것 같이 이렇게 배치가 되었던 것들. 마치 사냥하는 조각상? 아무튼 근데 여기 이렇게 산을 보고 있다던가 그리고 이런 작업들이 세잔 작업도 있고 르누아르 작업도 있고 유명한 작업들이 되게 많았었는데 이런 식으로 여러 각도에서 같은 조각상을 봐도 다양한 회화 작업들을 넘어서 볼 수 있다는 프레임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회화 작업이 프레임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이 항상 들었다면 조각상을 활용함으로써 그 프레임 너머에 있는 신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했다는 전시였던 것 같다. 이 작업 같은 경우에도 앞에 있는 조각상이랑 뒤에 있는 조각상의 인물 형상이 겹쳐지면서 볼 수 있게 층층에 있는 갤러리 안쪽으로는 이런 식으로 다음 조각상이 어떤 신을 가지고 있는지 굉장히 연극 같은 느낌도 받았었고.

엄청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들을 여기서 한 번에 봤던 감동이 굉장히 커서 이 전시를 보고 그냥 얘기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모든 것들이 다 유령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분명히 이 작업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그런 작업들도 많고 인물 형상이 들어가다 보니까 얼굴에서 나오는 형상, 감정적인 표현들이 굉장히 많았던 작품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다 각자의 시간을 가지고 있지만 그 시간들이 다 짜여져 있는 것 때문에 내가 길을 잃은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공간이 너무 커서 길을 잃기도 하고 (웃음) 막 뛰어다니면서 봤었다.

그래서 그런 경험들이 재미있었는데 한편 이 공간은 역시 로마인지라 이렇게 기둥도 멋지게 해놓고 그랬던 것이 기억이난다. 되게 재밌었다. 이런 식으로 또 다른 갤러리 다른 공간에 들어가면 이렇게 큰 설치 작업들, 그리고 여기에 추상 작업들이 있고 그 안쪽에 회화, 그 안에 굉장히 오래된 고대 조각상들이 섞여 있고, 이 작업 같은 경우에도 시간대가 엄청 다양하게 지금 보이는 것처럼 이 프레임이 이것도 동시대 현대 작업인데 뒤에 보이는 거 조각상이 섞여 있고, 계속해서 조각상들이랑 같이 경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되게 재밌었다.

이런 식으로 공간을 활용해서 옆에 그림이 바로 그려져 있기도 하고 아무튼 굉장히 유명한 작가들이 많이 쌓여 있는데 어떤 느낌이냐면 컬렉션 가지고 와서 했다고 읽었었는데 엄청 많은 대량의 컬렉션이 풍부한 컬렉션이 있는데 그 풍부한 컬렉션 혹은 빌려온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이렇게 조합해서 같이 배치했을 때 오는 기쁨이 마치 아주 잘 정돈된 남의 집에 가는 것 같으면서도 이 공간은 집이 아니라 화이트 큐브형 공간이어서 그런 게 흥미로웠던 것 같다.

이때 당시에는 이런 것들을 처음 봤기 때문에 굉장히 즐거운 마음으로 봤다. 이 전시를 제가 좋았던 전시로서 하나로 꼽았는데 다양한 해외 미디어에서 이 전시에 대해서 호평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읽어보니까 과거의 고전 작품과 새로운 동시대 작품 간의 유동적인 관계 이런 것들을 짜서 만들어보려 했던 시도였고, 한편 조각난 시간의 개념을 가지고 와서 짜맞추려 했던 시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참여했던 작가들의 일부에는 우리가 아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각자의 세계가 분명한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뒤섞여 있었다. 과거와 오늘날의 작가들이 같은 공간에서 마구 뒤엉켜 있는 풍경.

그런데 그 뒤엉킨 것을 관람객은 관찰하고 보면서 계속해서 재해석을 하는 시도하도록 문을 열어 주는 그런 전시였어서 굉장히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이것이 제게 좋았던 전시. 좋은 전시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을 하며 좋은 전시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정리해 봤다.

첫 번째는 ‘낯선 느낌’. 관람객이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것(지식, 감각, 감성, 느낌 등)을 마주하게 하는 것, 그로부터 즐거움 등 여러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분위기’. 이것은 편안함과 불편함에 연관된 것 인데 새롭지 않더라도 전시장이 전해주는 분위기가 매력적이라면 이미 경험한 전시여도 또 다시 전시를 찾아가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공간과 작업들의 조화가 좋은 경우 다시 찾게 되는 것처럼.

세 번째는 ‘요구와 응답’. 전시장에 방문한다는 것은 관람객이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에 따라 관람객은 이에 대응하는 만족감을 요구하는 것 같다. ‘낯선 느낌’ 또는 ‘분위기’ 등의 요소들이 전시에 들러 소요하는 시간과 노력 대비 기대 이하일 경우 관객은 실망할 것 같다. 기대감과 상관관계가 있기도 한데 예를 들어, 소규모 개인 전시,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 아트페어 부스형 전시 등에서 기대하는 바는 모두 다른 것 같다. 관람객의 입장을 고려하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전시가 실망을 덜 안겨 주는 것 같다.

마지막은 ‘서비스’. 복합적인 측면에서 이해가 가능한 부분인데, 관람객이 불편한 순간을 만들면 안 되는 것 같다. 사전에 동의를 구해 ‘합의된 불편함’(예, 작품이 의도하는 것)은 가능할 듯 한데 합의되지 않은 불편함을 설명 없이 제공하는 낯선 경험은 불쾌함이 되지 않을까?

한편, 다른 불쾌함들도 아주 가끔 있을 수도 있다.
1) 작가의 신랄한 악한 의도
2) 전시 기획자의 관람객 통제력/통솔력 부족
3) 다른 관람객의 에티켓 부족 등.
최적의 전시 관람 경험은 일정한 제한, 약속, 통제가 기반이 되기도 하기 때문.

지금까지 말한 내용들은 어쩌면 모두 다 너무 관람객의 입장에서 쓴 것들이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전시를 만드는 사람도 전시를 보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내가 즐거웠던 경험들, 말하자면 개인적으로 좋았던 전시로 보여드린 이탈리아 로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전시 <Time is Out of Joint>(2017- 2018)가 제가 말한 좋은 전시에 대한 조건들과 부합하는 건지 생각했을 때는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다. 그리고 그와는 별도로 제가 이 전시가 좋았던 또 다른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렸듯 기획자의 입장에서 전시의 주제적인 면이 와닿고 좋았기 때문인 듯하다.

한편, 우리가 앞으로 좋은 전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관람객의 입장에서 얘기를 해야 되는지 기획자의 입장에서 얘기를 해야 되는지에 대한 그것들을 오늘 논의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든다.

김민지

진짜 얘기 듣다 보니까 그 부분을 좀 확실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결론적으로는 저희 넷 다 관람자로서의 입장이 좀 더 컸던 것 같은데 결국에는 기획자로서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서의 어떤 지점들을 발견하는 것들을 좀 보여주는 부분들도 필요했던 것 같고 그런 생각이 어떻게 들으셨나요? 다른 분들은.

김얼터

재미있었다. 작품 배치에 대해서 생각을 잘 못하는데 이런이런 작업을 전시해야 되겠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 그것을 현실에 놓지 않고 그냥 단편적으로 그 작업만 생각하고 전시를 꾸리기 때문에, 전시장에 들어가서 작품을 실제로 놓았을 때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작업들끼리 만들어 나갈 때가 많다고 느낀다. 그래서 전시장에 어떤 제한이 있을 때, 예를 들면 2층이랑 3층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작업을 명확하게 분리를 해야 될 때 ‘어떻게 배치를 할까. 뭐하고 뭐를 붙여줘야겠다’ 그 정도만 생각하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실제로는 같이 놓으면 안 되는 작업이었던 적도 많고. 둘 다 영상 작업 이런 경우도 있고, 이거는 다른 작품 설치나 관람에 불편함을 줘서 같이 전시하면 안 되는 작업이었던 경우도 있고.

또 다른 경우에는 전시라는 게 물리적인 공간을 구성하는 일인데, 제 머릿속이 물리학을 다 아는 게 아니다 보니까, 실제 공간에서 봤더니 이 작업 뒤로 저 작업이 보이는 게 되게 재밌다고(내가 만든 전시지만) 생각할 때도 저는 종종 있어서 배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획자들은 약간 변태여야 된다고 생각을 한다. 기획자의 어떤 통솔력, 통제력 그러니까 작가가 의도한 대로 작품을 읽는 관객이 한 명도 없는 것처럼 기획자가 의도한 대로 그 전시를 보는 관객도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의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기획자가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창작을 하지 않는, 뭔가를 실제로 만들지 않는 사람이 배치로 그거를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저는 200%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실 그 의미를 강제하고 싶어서, 기획자는 변태여야 하지 않을지…….

김민지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에 우리가 아는 친구 작가의 작업인데 저거를 저렇게 기획자의 의도대로 조각상을 앞에 둬서 같이 보게 해야지 우리에게 친숙한 공간과 친숙한 작업일 때에도 과연 그런 비슷한 아우라가 있었을까. 여행 중이라는 특수성도 있고 진짜 흔치 않은 그런 공간의 아우라를 보이는 곳에서 봤기 때문에 그 작품이 좋았던 거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고. 아무튼 뭔가 조금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의 일상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는 것들을 제시하게 된다는 점에서 일상적으로 우리가 접하고 있는 이 근처의 전시들은 우리의 요구가 반영되지 않고 있나 그런 생각도 들고.

되게 복잡다단한 요즘 동시대 전시들에서 다루고 있는 것들이 저도 좋은 전시를 기억해내려고 했을 때 생각보다 쉽게 안 떠오르는 게 되게 나의 문제인가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뭔가 우리가 지금까지 직접 꺼내지는 않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어떤 또 그 닿을 수 없음들이 있지 않았을까 뭔가 그런 고민들도 한번 나눠보면 좋겠다.

김한라

희주 님이 보여준 전시가 너무 재밌었다. 재미있는 이유는 보거나 상상한 적 없는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왜 그런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면 그 전시가 열리는 외적 물리적 공간 그리고 그 전시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랑 그 안을 구성하는 작품 모두 다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영화 같다는 생각도 했다. 특히 처음에 보여주셨던 전시를 보면서 <러시아 방주>라는 영화가 떠올랐는데 그 영화도 배경이 궁전이고 그 영화를 감독이 한 샷으로 찍었는데 굉장히 다양한 시대와 다양한 시대의 인물들에 의해서 예술과 정치 등의 이야기들이 한 샷 안에서 카메라 무빙을 따라가면서 보여주신 전시에서처럼 방이나 공간의 구성, 분리에 따라서 전개된다. 각도나 시선 등이 달라지면서 그게 쭉 이어지는데 전시 기획을 영화처럼 할 수 있으면 되게 재밌겠다. 프레임에 딱 갇힌 그런 게 아니라 공간이나 시선에 여러 층위가 있고 연극 같은 느낌이 있고 시각적인 여러 가지 요소들을 다 하나하나 구성하고 매만져서 전시가 이루어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희주

맞다. 보통의 전시에서는 작품들이 요즘 가면 갈수록 시각도 그렇지만 어떤 이야기를 해야 될지가 엄청 중요해진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을 말하다 보니까 이야기끼리 맥락이 맞거나 혹은 같이 이야기 논하면 좋을 작품들이 같이 배치되고 섹션이 나눠지기도하고, 이런 것들이 대부분에 있는 우리가 요즘 전시장에 가서 기대하는 바 아닐까?

원래 영화를 정말 좋아하기도 하고 상상을 좋아하는데, 이 전시도 영화나 상상과 연결 지점이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전시 작품 개별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없을지언정 시각적으로 작품들끼리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정말 재밌었다. 혹은 누가 봐도 이 작품은 옛날 작품인데, 반대로 이 작품은 분명 동시대의 작품인데, 그러한 다양한 시대의 작품들이 서로 엮이면서 생동감을 구현하는 장면이 참 흥미로웠다.

그렇게 많은 것들이 어떤 시간에 속해 있는지를 관람객이 헷갈리게 되면서 나 자체도 지금 어느 시간대에 있는지 길을 잃게 되지만 그렇게 이상한 지점에서 되려 모든 게 같이 그냥 살아날 것 같은 그런 느낌. 되게 복합적이고 재미있었던 것 같다. 한라님이 말씀해 주신 <러시아 방주> 영화 잠깐 검색해 찾아봤는데 에르미타주 국립박물관을 막 뛰어다니면서 찍은 거 너무 재밌다. 근데 왜 이런 전시는 없을까?

김민지

없었나?

김희주

많이 못 본거 같다. 조각상이 뒤를 돌고 있는 전시 배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되게 새로운 시도였던 거 같다. 뭔가를 다른 특이한 방법으로 맛본 것 같은 느낌.

김민지

진짜 고전이었으면은 반발 시위도 일어났을 수 있을 것 같다.

김민지

질문이 있는데 전시의 기획이 탄탄하다고 느껴지는 그런 전시들의 경우 또 그와 달리 되게 관람자 철저히 관람자의 시선에서 이 전시에 대해서 뭔가 와닿는 지점들을 잘 찾을 수 있는 그런 것. 너무나 차갑지는 않게 그 둘이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김희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외적인 거 이미지적인 것만 말해서 그런 걸 수도 있는데 그 둘이 공존하는 전시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인스타 아이디가 영어 키보드로 설정 해놓고 한글 키보드를 생각하면서 ‘시간시간시간(tlrkstlrkstlrks)’ 이라고 시간을 세 번 치는 그런 건데 그만큼 시간에 관심이 많다. 영화를 비롯해 시간성이 있는 작업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하나의 선형적인 현실의 러닝타임 속 시간을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비선형적인 영화구성을 보면 흥미로운 것 같다.

이런 것들에서 되게 짜릿함을 느끼고 흥미로워하는데, 이 전시도 시간의 축을 비틀고 구성을 만드는 것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이 전시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매번 잘 연대기별로 분류와 나열이 되어 있는 것들을 한 데에 모아 서로 얽히게 해 매개 시키는 것. 그게 물리적인 배치로만 나타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또 생각해 보면 비물리적인 구성에서도 나타난다고 생각된다. 그런 지점에서 주제적인 면에서도 충분히 흥미로웠던 전시였다. 찢어져 있는 여러 가지 단편들을 엮어내 하나의 오방색 한복을 만드는 것 같은 전시였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 나름의 새로운 패턴을 발견하는 그런 재미가 있었다.

김민지

질문이 좀 쌩뚱 맞았는데 관람자의 시선이라는 지점에서 뭔가 최근 들어서 보이는 어떤 경향이라고 할 것이 블록버스터나 상업 전시가 아닌 이상 되게 일종의 지식이나 물적 감각을 소유하고 있는 그 소수를 좀 대상으로 하는 게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시를 기획할 때 내가 기억하는 전시가 그런 지점을 갖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 부분에 있어서 완벽히 뭔가 해결점을 찾을 수가 없다고 생각이 든다. 관람자라는 것도 너무나 포괄적이긴 하지만 일반 대중. 그런 걸 놓고 봤을 때 그들의 어떤 취향이나 문화적인 향유의 인식 그런 것들을 바꿀 수 없는 거니까 어느 정도는 외면할 부분은 외면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뭔가 우리가 지금까지 얘기 나눴던 좋았던 전시에 대한 이야기는 관람자의 시선이었고.

이제부터 이야기해 나갈 것은 기획을 하는 입장에서의 좋은 기획에 대한 이야기가 될 텐데 이 포지션이 바로 이렇게 전복되는 게. 어찌 보면 좀 그런 수용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민을 할 당위를 제공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도 좀 든다. 그 부분도 차후에 얘기를 좀 같이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포지션이 달라지면서 사실 어떤 기획자의 책임감 기획자가 제시해야 되는 방향 이런 책임감 또 같이 겸해서 오지 않을까 싶다.